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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보는 정조의 첫사랑 의빈 성씨(성덕임) - MBC 옷소매 붉은 끝동

생활정보&News

by DoDo-Hada 2022. 1. 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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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
옷소매 붉은 끝동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정조, <어제비문>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살아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정조,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나는 바짝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슬픈 사람의 마음은 매여 있지 않은 것 같다.
-정조,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안녕하세요 도도입니다 :)

오늘은 요즘 장안의 화제인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소재인

정조와 의빈 성씨(성덕임)의 사랑이야기와 관련해 실제 역사 속 기록은 어떠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정조는 업적만을 놓고 보아도, 학문적으로도, 신하들을 대하는 태도마저 빼놓을 것이 없는 성군이었지만

한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순수함으로 가득한 완벽했던 한 남자였던 것 같아요

 

정조의 의빈 성씨에 대한 사랑은 드라마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개인적으로 평소에 좋아하던 2PM의 준호, 이세영, 두 배우님이 열연해주신 덕에

역사 속 왕의 진실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어요

아마 지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찐몰입러 분들도 많을텐데요 ㅎㅎ

 

그래서 오늘은 의빈 성씨의 생애, 정조와의 러브스토리 등에 대해 

역사 속 기록들을 통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1. 의빈 성씨의 생애

2. 정조의 어제문(왕이 직접 쓴 글)

3. 역대 의빈 성씨 역을 맡은 배우

 


 

1. 의빈 성씨(성덕임)의 생애

의빈 성씨의 이름은 덕임으로, 본관은 창녕, 훗날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의 후궁이 되는 여인입니다.

 

 

-성장

덕임은 1753년(영조 29) 음력 7월 8일 출생으로, 아버지 증 찬성 성윤우의 자녀였는데, 아버지 성윤우는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조부)의 하인이었다고 합니다. 집안이 가난하고 변변치 않았지만 늦은 나이에 무관의 반열에 오른 성윤우는 1753년 교련관, 1754년 경복궁의 가위장이 되었으며 이후 여러 직위를 거쳤으나 벼슬을 지낸 기록은 없으며 1769년(영조 45)에 사망했습니다. 성윤우는 장흥 마씨, 부안 임씨, 단양 지씨와 삼혼을 하였으며 정실부인 3명 사이에서 5남 3녀를 낳았고 그 중 하나가 성덕임(부안 임씨의 자녀)인 것입니다.

 

 

-입궁

덕임이 입궁을 하게 된 계니는 아버지 성윤우가 전포 아문의 관리와 함께 나라에 바칠 돈을 7,000냥이나 써버리고 망하게 되면서 였습니다. 당시 덕임의 친어머니(부안 임씨)는 사망하고, 아버지 성윤우는 담벽증으로 와병 중이던 중에 10세 무렵 궁으로 들어가 혜경궁 홍씨의 수양딸 노릇을 하게된 것입니다. 당시 임오화변(1762년)으로 정조와 떨어지고, 청연공주, 청선공주가 출가하여 혜경궁과 만나기 어렵게 되어 덕임은 혜경궁의 처소에서 궁녀로서 자식 역할도 함께 한 것이죠.

 

의빈 성씨의 친필 글씨
<곽장양문록>을 필사한 의빈 성씨의 친필

의빈 성씨는 당시 고전소설인 <곽장양문록>의 국문 필사에 참여할 정도로 총명하고 재능과 기예를 두루 갖춘 여인이었다고 전합니다.

 

 

-정조의 승은 거절과 승낙

1766년(영조42) 정조가 첫 번째 승은을 내리자 의빈 성씨는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정조가 이를 납득하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1779년(정조 3)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인 원빈 홍씨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조는 이를 꺼리다가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일성록>에 전합니다. 화빈 윤씨를 간택한 후 정조는 의빈 성씨에게 다시 승은을 내리지만 의빈은 지난 15년과 마찬가지로 이를 거절합니다. 이에 정조는 의빈 성씨의 하인을 꾸짖고 벌하자 의빈 성씨는 뜻을 굽혀 승은을 받고, '상의'라는 특별 상궁 직첩을 받게 됩니다.

 

 

 

-자녀의 출산과 두 자녀의 죽음

의빈 성씨의 출산에 대한 기록은 황윤석의 <이재난고>와 정조의 <어제의빈묘지명>에 다른 기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재난고>에서는 의빈 성씨가 유산을 두 번 했다고 적혀 있고, <어제의빈묘지명>에는 정조와 의빈 성씨가 합궁한 달에 문효세자를 임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죠. 유산을 두 번 했다는 기록은 정조가 굳이 적지 않았거나 거짓 소문일 가능성 모두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어찌 됐든 의빈 성씨는 1782년(정조 6)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으며, 정조는 문효세자를 위해 창덕궁에 중희당을 건립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문효세자가 태어난 날 의빈 성씨는 정5품 상의에서 정3품 소용으로 오르게 됩니다. 이후 1783년(정조 7)에 문효세자가 원자로 책봉될 때 성씨는 정1품 의빈으로 봉해지게 됩니다. 이후 의빈은 1785년(정조 8)에 옹주까지 출산하였는데, <일성록>에는 정조가 "아들이 있는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고 기록할 정도로 좋아하였지만, 곧이어 옹주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경풍으로 요절하고, 2년 뒤 문효세자마저 홍역으로 요절하게 됩니다.

 

 

 

-의빈 성씨의 죽음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사망 이후 중병에 걸렸고, 요양을 하던 중 1786년(정조 10)에 임신 9개월 째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고 했다고 전하나, 현대 의학적으로 보았을 때는 단기간의 임신, 출산, 유산이 반복된 탓에 임신중독증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다고 하네요. 한편에서는 정조의 총애가 지극한 의빈 성씨에 대한 독사설(은언군, 이윤묵, 화빈 윤씨 등)도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2. 정조의 어제문(왕이 직접 쓴 글)

정조는 의빈 성씨가 죽은 이후 직접 묘지명과 묘표의 문장을 지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
옷소매 붉은 끝동

 

 

조선에서는 배우자를 위해 묘표나 묘지명을 쓰는 등 글을 쓰는 것이 흔하지 않았는데요. 왕실에서도 여성을 위해 묘지를 세우거나 묘지명을 쓰는 등은 사례는 해창위 오태주가 부인 명안공주를 위해 비석을 세운 일, 영조가 딸인 화순옹주를 위해 어필로 비석을 세운 일, 영조가 영빈 이씨를 위해 묘지명(어제영빈이씨백자묘지명)을 지은 일 등이 있으며, 정조가 의빈 성씨를 위해 묘표와 묘지명을 지은 일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영빈 이씨에 대한 영조의 사랑도 대단했는데, 아마 정조가 할아버지의 사랑꾼 피를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ㅎㅎ)

 

 

정조의 죽은 의빈 성씨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그리움은 묘표와 묘지명에 절절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아직 옷소매의 감동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분들은 실제 정조의 의빈 성씨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는지 보시며 다시 감동에 빠져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어제의빈묘표지명
어제의빈묘표지명

 

<어제의빈묘표>

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고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이르렀는데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정전이 아닌 천신을 향해 있는데 병에 걸려 위독해진 것은 어울리지 않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정전에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곧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감히 당석(잠자리)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 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고조부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고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를 추증한 일은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이기 때문이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왕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이렇게 묻은게 묘지명이다. 다행히 그 내용도 남겨놓아 묘를 발굴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어제의빈묘지명 항목을보면 훨씬 디테일한 언행과 사연이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있다)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후세 사람들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하게 여기고 불행한 운명을 슬퍼하게 할 따름이다.
<어제의빈치제제문>

건륭 51년 병오(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7일 정축

국왕은 의빈 창녕 성씨의 영혼에 유제하니 다음과 같다.

아! 나는 빈의 죽음에 더더욱 이와 같이 슬프다. 죽음으로서 떠나보낸 재앙은 비통하고 참혹하며, 인정과 도리는 끊어질 듯이 아픈 마음이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보다 심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로지 위로하고 애써 떨쳐 내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더위와 추위가 바뀌어갔다. 평상시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근심하지 않는 얼굴로 서로 잊고 지내는 듯했는데 빈의 죽음 때문에 이와 같이 슬프다.

아!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고 빈이 뱃속에 품은 아이는 문효세자와 같은 기운을 가졌다. 문효세자는 이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밀감을 가지고 소중히 대하며 애틋하게 여기고 그리워하기를 구했을 것이다. 또한 형제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참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할 길은 여기에 있고 도리를 떨쳐낼 방법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내가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오직 빈의 죽음에 대한 슬픔뿐이겠는가?

아아!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
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아아! 슬프도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3. 역대 의빈 성씨 역을 맡은 배우

 

배우 정은숙
<조선왕조 500년-파문>(1989), 배우 정은숙

 

이산 속 의빈 성씨
<이산>(2007~08), 배우 한지민

 

옷소매 붉은 끝동
<옷소매 붉은 끝동>(2021), 배우 이세영

 


 

한편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절절한 마음이 남은 기록은 많지만, 의빈 성씨가 재주와 기예가 있었음에도 정조에 대한 마음이 드러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 그녀의 초상화 기록도 없다는 점은 아쉬운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나마 정조가 남긴 기록이나마 남아 먼 과거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도 드네요 :)

여운이 끝나기 전에 정주행 한 번 다시 돌릴까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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